쉽게 사랑하고
어렵게 미워하고 싶지만
구슬기 산문집
김소라
우리 주변 가까이에 존재하지만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회화로 기록한다.
그곳들은 나의 아스라한 기억을 다시 불러오고, 무감각해졌던 감각들을 일깨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들을 회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과거의 기억과 현재 바라보고 있는 풍경 사이의 괴리감에서 오는 감정들을 회화로 표현한다.
본인이 재현하는 풍경들은 단순히 낭만적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닌 심리적 재현으로 재구성된 풍경화이다.
15P, 가만히 마를 때까지
그러니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마른 햇볕에 내어놓고 가만히 기다리면 곱게 말라 있다.
손이든 마음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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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P, 하루
아침에 갓 지은 마음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나왔어요.
현관을 나서 전철역에 다다르면 당신은 느긋하게 일어나 그 앞으로 걸어갈 것입니다.
옅어진 뜨거움을 조금씩 삼키고 옷장에 걸어둔 또 다른 마음을 걸치고 나가시길.
행여 걷다가 넘어질까 안전한 곳에 발자국들을 남겨놓았습니다.
저녁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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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P, 다시 오지 않는 시
・・・ 할머니가 떠나도 나는 시집을 다시 펼치지 않았다.
시보다 더 시 같은 말들이 귀 옆에 어른 거렸고, 문장 한 줄씩 곱씹다 보니 건조기 마저 다 돌아간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 몇 날, 몇 주, 몇 달이 지나도록 할머니 전화는 오지 않았다.
오지 않는 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는 오래도록 할머니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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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P, 영화로운 삶
언제나 기쁜 삶이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잦은 삶이 초라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살아있길 잘했다는 순간이 꼭 찾아오기 마련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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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P, 시작점
다정한 습관과 단단한 배려들이 만나 커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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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P, 보이는 말들과 소설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과 글로 남기는 편이라,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때문에 허덕일 때 아주긴 소설을 쓰기도 했다.
소설 안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무서워하는 사람, 그리운 사람과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
미안한 사람과 미안해해야 할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맡고 있다.
결말까지 다 썼던 새벽에 나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다시 읽어본 뒤, 모두 인쇄해 서랍에 넣어놓고 파일을 영구삭제 했다.
애주가가 술로 기억을 지우고 공병을 쌓듯 그렇게 나는 글의 흔적만 쌓아두고 원본은 영원히 지워버렸다.
그럼 복잡한 마음들이 한순간에 정리돼 몇 달 동안 불면증이 찾아오지 않았다. ・・・
글로 해소하는 내게 공감이 됐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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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P, 관성 같은 불안
불쑥 찾아오는 행복은 항상 불안을 업고 있다.
마침 봄바람이, 마침 5월의 노래가, 마침 빵 굽는 냄새가 거리에 잔잔히 깔렸을 때
행복하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입안에 머금었다. 그러자 그 뒤에 작은 불안이 나도 여기 있다며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나 비좁고 불안한 내 마음 때문에 행복을 온전히 누리는건 사치라 여긴다. 작은 불안이 뒷받침돼야 안심할 수 있어서,
일부러라도 불안을 행복의 등에 얹어주는 편이다. 나는 내가 불행한 상태에 더 익숙해져서 그런지 행복한 내 모습이 어색하다.
행복은 당연하지 않고 불행은 당연했던 세월이 관성처럼 몸에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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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P, 지나가는 것들
김이 모락 모락 나던 위로 안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의 문장이 들어있었다.
지나가는 인연은
지나가는 계절이랑 같은거야.
지나가는 인연은 지나가는 계절과 같다. 지나간다고 해서 돌이킬 수도 없고,
・・・ 초봄에 찾아온 꽃샘추위가 겨울 냄새만 잠깐 가지고 올 뿐, 예정된 봄 기운이 밀려오면 저 멀리 물러나듯이,
그러다 언젠가 내가 겪었던 그 시절의 봄, 그 시절의 여름, 가을, 겨울과 비슷한 계절이 또 한 번 찾아오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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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P, 새하얀 시간들
병원은 어찌나 그렇게 흰지. 흰 벽, 흰 침대보, 흰 베개, 그리고 흰 환자까지
온통 흰색투성이라 조그마한 피 한 방울도 바다처럼 깊고 넓게 눈에 들어온다.
할머니의 흰 속을 잡아본 곳도 그 흰 병원이었다.
삶은 유한하다는, 너무나 당연한 말을 당연해서 자주 잊어버린다.
할머니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에는 늙은 나와 더 늙은 할머니가 마당에서 꽃놀이를 하고 있다.
이젠 나도 할머니만큼 주름이 많다는 걸 자랑하면서, 해넘이와 해돋이를 꼭 같이 수십 번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노화와 죽음은 온전히 나의 것일 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겪지 않을 것이라고,
거리의 취객을 보듯 모른척 하기 바빴다.
누구의 삶도 영영 길지 않다. 길지 않은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죽음에 다가서는 장면은 늘 어색한 일이라 자꾸만 고개를 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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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P, 슬픔은 바람처럼 저 멀리
우리는 또 언젠가 젖은 옷과 마음으로 슬픔을 재차 머금을 수밖에 없겠지만,
다시 후 - 하고 뱉어내면 그만이겠지요. 슬픔은 바람처럼 저 멀리 보내고 새로운 마음을 함께 머금었으면 해요.
다 괜찮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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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P, 흘려보내기
슬픔은 막기보다 흘려보내야 하는 것.
꼭 지나가야 하는 감정을 구태여 막으려 들지 않고 저 멀리 흘려 보내기.
그러나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려워서 매번 처음보다 조금 더 커진 슬픔을 나는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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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P, 쉽게 사랑하고 어렵게 미워하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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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P, 욕심의 탄생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겪고 나면 세계관은 한층 더 넓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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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P, 너의 집이 나의 집이었으면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그 친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집으로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아프지만 않길 바라며 이기적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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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P, 내일의 기쁨
잔잔한 호수는 해일을 두려워하지만, 파도가 잦은 바다는 해일이 지나갈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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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P, MJ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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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P, 낡은 소리
나는 늘 내 생각보다 조금씩 더 낡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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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P, 당신은 여전히 그해에 있고
나의 사랑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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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P, 사랑은 밀도
사랑은 부피보다 밀도라고, 편지 끝단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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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P, 돌아간다는 희망으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도 '새봄'이라는 말을 붙이기 어려운 시간이 이어진다.
희망은 섣부르다 말하지만, 섣부를수록 더 나아질 가능성은 커진다.
나는 부디 나와 당신이 꾸준히 희망을 안고 살아갔으면 한다. 여기는 소설 바깥의 세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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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P, 잠옷
나에게 사랑은
겨울밤 잠옷을 이불 밑에 넣어
당신의 바깥 옷보다 따뜻하게 데워두는 것.
아마도 가장 좋아하는 시집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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