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책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J:won 2024. 9. 7. 22:49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해설중
 
 
1. 인생은 아름답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그러니까 좋은 시는 rhyme(미적인 것)과 reason(논리적인 것)을 겸비한다.
 



 
78P, 사실
 
별들이 움직이지 않는 물 위를 고요가 흘러간다는 사실
물에 빠진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
오늘 밤에도 그 애가 친지들의 심정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물을 무사히 건넌다는 사실
한양대학교 옆 작은 돌다리에서 빠져 죽은 내 짝은 참 잘해줬다, 사실은
- 늘 죽은 사람에게는 들려주지 못한 것이 많다, 사실일까
사실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죽은 사람에게는 들려주지 못한 것도 많을 텐데
노래가 여기저기 떠도는 이유 같은 거
그 사람이 꼭 죽어야 했던 이유 같은 거
- 산 사람대로 죽은 사람대로 사실대로


 
 짝이었던 친구의 죽음을 소재로 한 시로 보인다. 
"사실"이 반복되면서 '사실'이라는 중립적인 어휘가 덜컹거리는데, 이렇게 어떤 단어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원래는 죽어 있었던 것처럼 갑자기 살아난다.
친구의 죽음 자체는 과학적 사실이지만, 그 아이가 지금도 친지들의 심장 속을 다녀간다는 것은 감정적 사실이며, 또 이 죽음과 관련된 나의 사실이 있고, 이 모든 사실이 다 담아내지 못하는 친구의 내적 사실도 있다. 이런 변주 속에서 우리가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사실이란 도대체 몇겹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이제 이성의 일이다. 
 
진은영의 좋은 시들은 대체로 라임과 리즌의 절묘한 교직물이다. 
 
 



 
10P, 그러니까 시는
・・・


예컨대 그것은 절망을 재료로 삼을 때가 있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 행위이고, 때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쓰이며, 시를 쓰는 이를 자신과 화해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동시대의 현실에 밀착하는 증언자일 때도 있으며, 죽어가는 이의 곁을 무릎 모아 지키는 성실한 입회자이고, 끝나지 않는 애도의 표상이기도 하고 ・・・.
정말 인생은 아름답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좋은 시에는 모두 있다. 
어느 하나가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팽팽한 경쟁의 감미로움과 함께.
 
 
 
 
2. 사랑과 저항은 하나
 
 
9P,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별들이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 시각의 청각화
벌들이 별들처럼 웅선거린다 = 청각의 시각화
 
"오래된 거리처럼"
두 사람의 현재가, 과거로는 깊은 뿌리를 뻗었고 미래로는 긴 가지를 드리웠다는 것
"여름에는 - 비를 줄게"
당신의 미래에 필요한 그 무엇이 되고 싶다는 의미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둘의 미래가 장밋빛일 수만은 없을 가능성을 감수하겠다는 각오
 
현재의 사랑은 과거를 보상하고 / 보상받고 싶게 한다.
 
미래를 함께 준비하면서 그 앞에 당당해지겠다는 결심,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되살려 둘의 과거를 구원하자는 제안, 바로 그런 것이 청혼이라고 이 시는 말한다. 
 
 



 
 
27P, 사랑의 전문가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맹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부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러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오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사랑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사랑받는 대상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이 시는 사랑을 믿는 너의 행동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복기하는 시다.
모든 문장이 인과관계로 촘촘히 연결돼 있다. 
돌맹이 > 식물 > 피가 흐르는 동물
그 피가 바닥을 이룰 정도가 되어 네가 발가락을 담그자 바다는 기름이 되어 타오를 준비를 하는데, 
그러나 네가 나를 사랑하다 그쳤으므로("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그 기름은 불로 타오르지 못하고 폐유가 되어 바다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바다로부터 한 번 생겨난 기름은 다시 바다로 섞이지 못하는데, 그게 당연한 것처럼, 내 사랑의 슬픔도 망각 속으로 섞여 사라지지는 않더라고 이 시는 말한다.
 
 
3. 사랑과 치유도 하나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만일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고 또 소통하면서 그를 자기 안에 들인다. 이 일이 쌍방향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서로를 나눠 가지면서 '나도 그도 아닌' 제3의 존재가 된다. 내 말과 행동 속에 그의 영향이 배어 있다고 느낄 때 나는 내 안의 그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설사 상대방이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때 내가 하는 말은 나를 통해 그가 하는 말이고, 이제 그는 나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생각하는 방식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에게 바쳐진 작품들이 이 시집에 함께 적혀 있다.
 
 
4. 그리고 사랑과 예술도 하나
 
 
'아름다움이란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인간은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온전한 존재가 되려는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삶이 부서진 어떤 사람에게 '예술적 자극'은 곧 '치유적 자극'이 된다는 것.
그렇다면 아름다움(예술)은 인간을 '해결'하는 사랑의 작업이 되고,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분쟁'과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 
 
 
 


 
 
 
시인의 말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시집중
 
 
9P,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10P, 그러니까 시는
 
-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 내속에 매달린
영원히 익지 않는 검은 열매 하나
 
 
18P, 어울린다
 
너에게는 피에 젖은 오후가 어울린다
죽은 나무 트럼펫이
바람에 황금빛 소음을 불어댄다
 
너에게는 이런 희망이 어울린다
식초에 담가둔 흰 달걀들처럼 부서지는 희망이
 
너에게는 2월이 잘 어울린다
하루나 이틀쯤 모자라는 슬픔이
 
너에게는 토요일이 잘 어울린다
부서진 벤치에 앉아 누군가 내내 기다리던
 
너에게는 촛불 앞에서 흔들리는 흰 얼굴이 어울린다
어둠과 빛을 아는 인어의 얼굴이
 
나는 조용한 개들과 잠든 깃털, 
새벽의 술집에서 잃어버린 시구를 찾고 있다 너에게 어울리는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 빛 속을 걷는다
 
네 손에는 끈적거리는 달콤한 망고들
네 영혼에는 망각을 자르는 가위들 솟아나는 저녁이 잘 어울린다
 
너에게는 어린 시절의 비밀이
너에게는 빈 새장이 어울린다
피에 젖은 오후의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이
 
 
18P, 사랑합니다
 
내 모든게 마음에 든다고 
너는 말했다
남색과 노랑의 대비처럼
 
사막을 걷는 중이라고
너는 말했다
환상의 바다를 쏟으면서
 
너는 말했다
시간은 가득한 거야
달콤한 과일 속에 검은 벌레들로
 
내 심장은 밀랍사과
약속의 심지가
네가 뱉은 모래의 입속에서 타오른다
 
너는 말했다
아름다운 밤들이 모래처럼 쌓인
사막이 있을거야
 
밤이 애나멜 구두처럼 반짝거렸다
맨발로 어디든 -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20P, 봄에 죽은 아이
 
막을 수 없는 일들과 막을 수 있는 일들
두 손에 나누어 쥔 유리구슬
어느 쪽이 조금 더 많은지
슬픔의 시험문제는 하느님만 맞히실까?
 
부드러운 작은 몸이 그렇게 굳어버렸다
어느 오후 미리 짜놓아 굳어버린
팔레트 위의 물감, 종이 울린 미술 시간
그릴 것은 정하지도 못했는데
 
초봄 작은 나뭇잎에 쌓이는
네 눈빛이 너무 무거울까 봐 눈을 감았다
좋아하던 소녀의
부드러운 윗입술이 아랫입술과 만나듯
너는 죽음과 만났다
 
다행이지, 어른에게 하루는 배고픈 개들
온종일의 나쁜 기억을 입에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 세월이 어서 가고 너의 아빠도
말랑한 보랏빛 가지를 씹어 그걸 쉽게 삼키든
죽음을 삼킬 테지만
 
그 전에, 봄의 잠시 벌어진 입속으로
프리지어 향기, 설탕에 과묻힌 이빨들은
사랑과 삶을 발음하고
 
오늘은 나도 그런 노래를 부르련다
비좁은 장소에 너무 오래 서 있던 한 사람을 위해
코끼리의 커다란 귀같이 제법 넓은 노래를
봄날에 죽은 착한 아이, 너를 위해
 
 
27P, 사랑의 전문가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맹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부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러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저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몰며 영원히 
 
 
28P, 조직 생활자
 
- 나는 짧게 깎인 날개로 날아오르려고 했다
조금씩 부서지는 누런 하늘의 모서리
나쁜 소식이 재처럼 쌓인 회관을 쓰고
 
나는 본 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영원히 날아가려 했다
폼페이의 잔해 더미에 그려진 
수탉들처럼
 
어찌할 수 없는 폭풍이 이 모든 폐허를 들어 올릴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그 절망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 때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 슬픔으로 얼룩진 내 얼굴과의 경쟁에선 번번이 패배했다
 
 
32P, 생일
 
- 어머니 생을 주셔서 감사해요
존재의 가시에 찔리면서
엮은 부채의 장미꽃 한 다발을
 
 
34P, 남아 있는 것들
 
나에게는 끄적거린 시들이 남아 있고 그것들은 따듯하고 축축하고 별 볼 일 없을 테지만 내게는 반쯤 녹아버린 주석주전자가 남아 있고
술을 담을 순 없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퀭한 눈이 있고 그 속에 네가 있고
회색 담벼락에 머리를 짓이긴 붉은 페인트 붓처럼 희끗해진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은 네가 있고,
젖은 바지들의 돛, 아침의 기슭엔 면도한 얼굴로 말끔하게 희망이, 오후가 되면 거뭇거뭇 올라오는 수염 같은 절망이 남아 있고
또다시 아침, 부서질 마음의 선박과 원자로들이, 잘 묶인 매듭처럼 반드시 풀리는 나의 죽음이 남아 있고
 
 
56P,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 식어가는 바람의 가는 손목을 잡고 긴 강을 건널 수도 있다. 그런데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하나의 영원에서 다른 영원으로 날아가는 붉은 단도처럼
네 얼굴 위로
잎들이 쏟아지는 동안
활활 불타오르는 문고리를 오래 잡고 있기라도 하듯이 
지금 네가 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 잎 하나를 
가만히 쥐어보는 동안에
 
 
75P, 봄여름가을겨울
 
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 봉투도 비밀도 없이. 전적으로 열린채.
오후의 장미처럼 벌어져 여름비가 내렸다. 
나는 네 밑에 있다. 네가 쏟은 커피에 젖은 냅킨처럼. 
만개의 파란 전구가 마음에 켜진 듯. 가을이 왔다. 
내 영혼은 잠옷 차림을 하고서 돌아다닌다. 맨홀 뚜껑 위에 쌓이 눈을 맨발로 밟으며
 
 
79P, 사실
 
- 산 사람대로 죽은 사람대로 사실대로
 
 
80P, 스타바트 마테르
 
- 나는 밤의 부속품처럼
어둠 속으로 깊숙이 떨어져 나왔어요
별처럼 순한 당신 눈빛과
네 개의 길고 따듯한 배 속을 지나가는 계절들 사이에서도 
소화되지 않은 채 나는 남았어요
 
당신은 오래된 술 같아요
내가 마시는 술에 슬픈 찌꺼기가 떠도는 건 
내 탓이 아니에요, 어머니
무엇을 마시든, 나는 두꺼운 취기를 껴입지만 늘 추워요
나를 향해 당신이 동굴처럼 뚫려 있기 때문
 
 
83-86P, 아뉴스데이, 새뮤얼 바버
 
- 당신과 당신을 사랑한 사람들의 신념으로
신이 머물렀다 막 떠난 도시처럼
이곳이 아직 따듯한 것이라고
조용히, 당신처럼, 비유로 말하고 싶습니다
 
 
87P, 일대기
 
그는 태성상 하나의 성소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누군가가 죽음과 태양을 바로 쳐다보고 존재의 얇은 빙판을 밟게 되는, 위대한 장소는 될 수 없다는 깨달음. 
그는 심하게 먼지 나고 들어가기에 너무 비좁은, 몹시 높고 붉은 쪽문을 가진 다락방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도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 곳이 부서진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곳이었으면. 낡고 쓰다 버린 것이지만 먼 나라의 것이라 낯선 폐품 더미 속에서 잠시 혼이 나간 아이처럼,
도무지 쓰임을 알 수 없는 이상하고 망가진 물건들 사이에서, 또한 모든 이가 어느 다락방에 쌓인 낡은 몰락의 일종이었음이 문득 자연스러워지는
오후 한 때
 
 
89P, 라푼젤, K를 기다리다
 
- 몸이 가장 오래 암기한 건 고문의 기억.
 
 
92P, 방을 위한 엘레지
 
- 꿈이 죽은 도시에서 사는 일은 괴롭다
누군가 살해된 방에서 사는 일처럼
 
 태양계의 세번째 행성이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듯
봄이 겨울을 이기고 온다는 것과 그 반대도 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뒤에 오는 것이 승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화성이여 지구를 이기길
내일이여 오늘을 이기길
썰물이여 밀물을 이기길
 
그러나 봄, 여름 뒤엔 다시 겨울이고 -
 
가장 나중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든 다른 것이 시작될 때마다
예언은 빛나며 빗나갈 테니까
여기는 방이 아니라 거리이며
나는 다만, 여기를 걸어서 지나가는 거라고
벽과 벽 사이를 서성이며 생각하는 것이다 -
 
 
96P,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 싶다
 
흰 항아리가 되어 작은 꽃들과 함께 네 책상 위에 놓이고 싶다
네 어린 시절의 큰 글씨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알맞게 줄어드는 글씨를 보고 싶다
토끼의 두 귀처럼 때때로 부드럽게 접힐 줄 아는 네 마음을 보고 싶다
베여 나간 나무 밑동의 향기에 인사하듯 길게 구부러지는 
너의 훌쩍 자란 등뼈를 만져보고 싶다
 
세상의 비밀을 전해 듣고
분노 속에서 네가 무엇도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
단 하나의 사물이 되고 싶다
네 속에 잡혀 벽을 향해 던져지며 부서지는 항아리가
단단하게 굳어 제대로 모양 잡힌 기억이
 
한밤중에 일어나 네가 연인의 잠든 얼굴을 한번 만져보고
나쁜 꿈의 물풀들을 천천히 쓰다듬는 날들이 지나가고
너의 늙어가는 얼굴 가득 물결처럼 번지는 주름을 보고 싶다
공원 벤치에 잠시 지팡이를 세워두고
새벽별들처럼
아침이 고요하게 거둬들이는 
네 마지막 숨결을 느끼고 싶다
 
-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싶다
지금 내 곁의 빈 나무 관 속을 떠돌며
반쯤 지워져가는 네 얼굴 위로 내려앉기를 기다리는
마른 먼지만 
아니라면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너를 위한 기억의 데스마스크로
망각 법원의 길고 어두운 복도마다 걸리고 싶다
무겁게 쌓인 먼지를 털면
가장 오래된 슬픔의 죄수들이
쇠창살 사이에서 기웃거리는 표정처럼
 
 
102-5P, 쓰지 않는 것들
 
- 시작과 끝은 공통이라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중얼거렸다고 한다.
- 공통이 아니라 고통 말이야.
 
-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물 한방울 없이 바싹 마른 채로.
 
- 나는 이사 갔다 강에서 가장 먼데로
 
 
106P,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
 
-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
 
- 할머니가 발가락처럼 거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이 먹었는데 절망해도 되나
죽을 때까지 절망해도 되나
차창 밖에다 물었다
검은 상자를 칸칸이 두드리며 물었다
 
- 멈추는 것들은 대개 그렇듯, 슬프거든
 
 



 
 
"나는 이미 한때 소년이었고 소녀였으며,
덤불이었고 새였고,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말 못하는 물고기였으니."
아무래도 나는 엠페도클레스의 후예인가 보다.
사랑의 윤회를 믿는 것 같다.
 
 
 
사랑의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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