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책 : 흰

J:won 2024. 11. 2. 20:36

 

 

 



한강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 -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흔들리거나, 금이 가거나, 부서지려는 순간에 당신을, 내가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흰 것들을 생각한다.


 

 

21P 달떡

 

 

29P 흰도시

-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30P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속으로 새어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밤이면 불을 끈 거실 한쪽에 소파침대를 펴고 누워, 잠을 청하는 대신 그 해쓱한 빛 속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흰 회벽에 어른거리는 창밖 나무들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 이  도시와 비슷한 어떤 사람- 의 얼굴을 곰곰히 생각했다. 그 윤곽과 표정이 서서히 뚜렷해지길 기다렸다.

 

 

33P 빛이 있는 쪽

그이가 나에게 때로 찾아왔었는지. 잠시 내 이마와 눈언저리에 머물렀었는지.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는지. 

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죽지 마. 죽지마라 제발. 해독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목소리를 향해, 희끗한 체온이 있는 쪽을 향해, 어둠속에서 나도 그렇게 눈을 뜨고 바라봤던 건지도 모른다.

 

 

39P 초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는다. 아무것도 소스라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촛농은 희고 뜨겁다. 흰 심지의 불꽃에 자신의 몸을 서서히 밀어넣으며 초들이 낮아진다.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48P 서리

그녀가 태어난 날은 눈이 아니라 첫서리가 내렸지만, 그녀의 아버지도 딸의 이름에 설자를 넣어주었다.

자라면서 그녀는 남들보다 추위를 타는 편이어서, 자신의 이름에 들어 있는 차가움 때문이 아닐까 원망하기도 했다.

 서리가 내린 흙을 밟을 때, 반쯤 얼어 있는 땅의 감촉이 운동화 바닥을 통과해 발바닥에 느껴지는 순간을 그녀는 좋아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서리는 고운 소금 같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태양의 빛은 조금 더 창백해진다. 사람들의 입에서 흰 입김이 흘러나온다.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며 차츰 가벼워진다. 돌이나 건물 같은 단단한 사물들은 미묘하게 더 무거워 보인다.

외투를 꺼내 입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뒷모습에, 무엇인가 견디기 시작한 사람들의 묵묵한 예감이 배어 있다. 

 

우리 언니가 생각나는 글

겨울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름에 '설' 이 들어가며 추위를 극심하게 타 여름에도 보일러를 틀고 잔다

 

 

50P 날개

이 도시의 외곽에서 그녀는 그 나비를 보았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십일월 아침 갈대숲 옆에 날개를 접고 누워 있었다.

여름이 지나고는 나비들을 전혀 보지 못했는데, 그동안 어디서 버텨왔던 것일까?

지난주부터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는데, 그사이 날개가 몇 차례 얼었다 녹으며 흰빛이 지워졌는지 어떤 부분은 거의 투명해 보였다.

바닥의 검은 흙이 어른어른 비쳐 보일 정도였다. 시간이 좀더 흐르면 남은 부분도 완전히 투명해질 것이다.

날개는 더이상 날개가 아닌 것이 되고, 나비는 더이상 나비가 아닌 것이 된다. 

 

 

51P 주먹

 

 

53P 눈

함박눈이 검은 코트 소매에 내려앉으면, 유난히 큰 눈의 결정은 맨눈으로 볼 수 있다. 정육각형의 그 신비한 형상이 조금씩 녹아 사라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일, 이 초. 그걸 묵묵히 지켜보는 짧은 시간에 대해 그녀는 생각한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눈을 바라본다. 버스에서라면 얼굴을 들고 한동안 차창 밖을 응시한다. 어떤 소리도 없이, 아무런 기쁨도 슬픔도 없이 성근눈이 흩어질 때, 이윽고 수천수만의 눈송이들이 침묵하며 거리를 지워갈 때, 더이상 그걸 지켜보지 않고 얼굴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58P 파도

-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먼 바다의 잔잔한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닐 같다. 수천수만의 반짝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59P 진눈깨비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60P 흰개

 

 

96P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회복할 때마다 그녀는 삶에 대해 서늘한 마음을 품게 되곤 했다.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99P 흩날린다

저물기 전에 물기 많은 눈이 쏟아졌다. 보도에 닿자마자 녹는 눈, 소나기처럼 곧 지나갈 눈이었다.

 잿빛 구시가지가 삽시간에 희끗하게 지워졌다.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변한 공간 속으로 행인들이 자신의 남루한 시간을 덧대며 걸어들어갔다.

그녀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사라질-사라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통과했다. 묵묵히.

 

107P 흰나비

 

 

117P

그러니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133P 작별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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