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서덕준
프롤로그
저에게 시는 미완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숱하게 멍들고 체했던 마음을 해소하게 해준 나만의 세상이었습니다.
15P, 숲
이름 모를 숲속으로 사라지자
언어의 바깥으로 확 도망가버리자
지도의 찢긴 부분 속으로
아무도 모르는 그 숲속으로 없어져버리자.
노래를 부르면 곧 새가 되고
숲속을 달리면 내가 사슴이 될 수 있는
그 환상의 숲으로.
이름이 없어도 내가 나일 수 있는 곳으로.
18P, 초록
초록을 사랑하는 요즘
꽃말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모든 것이 다시 재생되는 계절에
덩달아 피는 식물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저 너머 능선으로 구름 자국이 돋고
마치 바람에도 색깔이 있는 것처럼 푸른 냄새가 날아오는 시간
줄기 사이에 꽃봉오리가 이야기할까.
창가에 놓인 화분들에 물을 얹으며 잎사귀의 이야기를 듣는다.
사람은 살아서 사람이라
사는 이유를 물으면 구태여 죽음을 좇게 되는 것인데
부쩍 삶의 이유를 읊는 일이 잦아지고
불쑥 꿈으로 영원히 도망쳐버리고 싶은 요즘
그래서 나는 더욱 식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물을 주면서 잎에 닿는 물의 형태를 동경하며 건네는 질문
넌 사소한 것이라도 삶에서 무언가를 머금을 수 있구나
그래, 나는 오늘 초록으로부터 삶의 모양을 닮아보기로 한다.
24P. 애틋한 월담
- 겨울을 건너서
저 깊은 곳에 있던 기온이 뭍으로 올라오는 계절에
꽃의 장마가 저물어가는 날씨에
당신은 나를 월담하고
나는 그런 당신을 기다리고
26P. 날이 참 좋네요
- 나는 나만 볼 수 있는 그 오색의 실로
당신과 나의 약지에 매듭을 짓죠.
손을 잡지 않아도
지저귀는 마음은 차마 숨길 수 없습니다.
그저 날이 참 좋다고
말 한마디 건넬 수밖에요.
36P. 밤의 유영
너와 밤을 헤엄치는 꿈을 꿨어
우리는 누구도 발 딛지 않은 섬에 가 닿았어
하늘에는 파도가 치고 아무도 이름 지어주지 않은 별의 군락이 있었지
이름 없는 물고기 떼가 수면 근처를 은하수처럼 헤엄칠 때 네가 그곳을 가리켰어
나는 쳐다볼 수 없었지, 너무 낭만적인 것을 너와 함께하면 벼락처럼 너를 사랑해버릴까 봐
네가 나를 보고 등대처럼 웃었어, 잠시 눈이 멀었던 것은 비밀로 할게
네가 무슨 말을 꺼낼 때 고래의 울음이 머리 위를 지나갔어, 너는 내게 불멸처럼 사랑한다 했을까
누구도 믿지 않는 허구의 전설이 너라면 나는 질긴 목숨처럼 믿기로 했어
너는 옅은 거품처럼 사라졌나 꿈 안의 꿈으로 도망쳐버렸나
눈을 뜨니 너는 없고 베개에는 짠내가 났어
창밖은 여전히 푸른 물로 가득 차 있었지
천 년도 아깝지 않은 유영이었어.
45P. 사월
- 봄은 해일처럼 덥석 몰아닥치는데
마음은 속절없이 죄다 꽃 투성이고
48P. 약속
- 우리 마음의 씨실과 날실이 더욱 촘촘해지기로 해요
서로에게 범람하기로 해요
달가운 침범을 일삼기로 해요
삶의 건너편까지 마중하기로 해요
서로의 여백을 아름다운 엔딩으로 메꾸기로 해요
당신이 해가 되는 날이면 내가 달이 되어주기로
손가락을 장미 덩굴처럼 걸고-
52P. Y에게
설익은 마음에 볕이 든 날이 있었다. 그때가 봄이었을까. 바람 곁에 아카시아가 다녀갔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는 걸 보니
아마 오뉴월쯤이었을까. - 교과서 페이지가 새의 날갯짓처럼 펄럭이는 소리, 분필이 철판과 마주하는 소리가 조용한 교실에 반주처럼 흘렀다.
- 봄이 지나고 여름이 걸어오고, 마음의 온도가 계절을 따라 데워지던 어느 여름밤에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구나, 하고
- 여울진 마음에 Y는 갈수록 색이 짙어져만 갔다. - 나는 그애를 강변에 흔들리는 억새처럼 무성하게도 사랑했다.
- 난로의 열기가 창가에 아지랑이로 피어오르고, 나는 그 애를 두 눈으로 훔칠 때마다 불현듯 아득해지곤 했다. 너무도 데워진 마음 때문이었는지,
교실 난로의 열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나는 너의 살굿빛 피부에 잠을 자던 솜털을 사랑했고, 눈동자에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을 사랑했고, 너와 함께했던 그 시절을 사랑했고, 교실 창밖에서 불어오던 꽃가루를 사랑했고・・・
60P. 장밋빛 인생
강물이 마르고 별이 무너져 내려고
너의 장밋빛 인생을 -
65P. 아타카마
바다와 등을 맞대고 늘 젖은 척추를 굽어 늘 메마른 마음으로 아타카마 사막은 그곳에 있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마음 그 가뭄 진 마음 사이마다
입병처럼 소금 자국이 열거된 아타카마에 사상 유례없는 폭우가 예보되었다. 황무한 마음에 첫 세례처럼 몇 날 며칠, 쏟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찌할 수 없는 그 통제 불능을 내리 맞았다. 쏟아지는 것은 왜 자꾸 마음을 젖게 하는지, 욱신거리는 마음을, 일렁이는 마음을 도무지 참다못해 아타카마 사막의 씨앗들은 모두 스스로를 와락 피웠다.
사막이 처음으로 잔뜩 꽃밭이었던 날이 있었다. 하루만이라도 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던 사막의 서툰 욕심, 미처 다 식지 못한 마음, 멀미 같았던 개화.
이제 아타카마는 다시 사막으로 회귀한다. 다시 메마른 마음으로 등을 구부리고 다시 기다리는 마음으로 수천수만의 씨앗은 눈을 감고 가시 잔뜩 피어날 아타카마 사막의 꽃밭을 꿈꾸면서 다시.
67P. 고요한 침식
너는 바다였고 나는 절벽이었다.
너로 인해 마음이 무너지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요히 뒷걸음치는 것.
사랑은 그렇게 매일을 네게서 물러나는 것이었다.
72P. 휘청
왜 이리도 징검돌을 허투루 놓으셨나요.
당신 마음 건너려다 첨벙 빠진 후로
나는 달무리만 봐도
이제는 당신 얼굴이 눈가에 출렁거려
이다지도 생애를 휘청입니다.
77P. 자목련 색을 닮은 너에게
-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모두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저무는 것들이었다.
80P, 도둑이 든 여름
나의 여름이 모든 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도 좋습니다.
내가 세상의 꽃들과 들풀, 숲의 색을 모두 훔쳐올 테니
전부 그대의 것 하십시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83P, 맑은 곳에도 비가 내린다
너를 사랑하고부터는 맑은 곳에도 비가 내린다.
울 것은 많고 마음의 소묘에 네가 번지는 일이 잦고
우울한 것들이 나의 호흡 사이사이로 빽빽해진다.
창백한 낮에 비가 내리고 무지개는 스스로를 실종한 지 오래
너는 언제까지 슬픔 사이로 촘촘해지니.
비스듬한 마음 사이로 너는 비처럼 나를 적시고
나의 원고지에는 네가 쏟아지고.
88P, 사월 심삽 일에 관하여
방 안의 온 벽지마다 잡초처럼 어둠이 번진다. 속살거리는 흰 커튼에 밤공기는 자수로 새겨지고 네가 침범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나는 이불을 치우고 침대 테두리에 걸터앉아 옆자리를 비운다. 네가 앉을 빈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네가 내 마음에 발을 담그고 있는 동안엔 매 순간이 상냥한 학대이며 통증이다. 홀로 사랑함은 핍박처럼 혹독하지만 단편보다 짧았던 기억만으로도
나는 오늘도 사랑한다. 날마다의 이 학대가 내게는 한없이 눈물겹다. 네가 만드는 고요한 파문은 나를 오랫동안 삐걱이게 한다.
두 발로 서있을 수 없는 마음의 파열, 마음이 저물기 전까지는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이렇게도 누군가에게 재난 같은 존재라는 것을 너는 아는가.
- 얼룩한 옷의 소매로 눈을 닦으러 잠시 고개를 돌렸더니 침대 옆 빈자리에 오늘도 불현듯 네가 있었다. 유언보다 눈물겨운 것이 사랑이라 네가 왔나,
아니면 오늘도 나는 나를 속이고 있는가, 옆에 네가 보인다.
그때 그 사월 십삼 일의 섭씨와 비슷한 미소를 하고서는,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고서는. 나는 그런 너의 어깨에 잠시 뺨을 얹는다.
이 상냥한 학대를 오늘도 견뎌내며, 오늘도 덥석 사랑했다고 말하면서.
90P, 당신을 기어이 사랑해서 오늘도 밤이 길다
당신을 기어이 사랑해서 깊은 밤
- 당신의 장편소설을 훔쳤으나 사랑한다는 고백은 찢겨 있고
나는 결국 버려진 구절이 되는 밤
당신은 사전에 실리지 않은 그리움
당신과 내가 하나 되는 문장을 위해서
내 모든 생애를 바쳐 시를 쓰는 밤
당신을 기어이 사랑해서 오늘도 밤이 깊다.
93P, 꿈에
뛰어내리면 어느 낯모를 엽서가 사랑을 속살거릴
그전 자주색 세상의 절벽 끝에서 꿈에
나는 너의 쇄골에 귀를 대고 등을 쓰다듬고 너는
잃어버린 악보를 숨결로 연주하고 우리
왠지 짙은 사랑을 할 것만 같고 꿈에
너의 체온이 실화였으면 하고
너는 올이 촘촘한 감청색 스웨터, 테가 굵은 검정 안경
나는 전설처럼 그 품에 와락 안겨 있고 꿈에
바람에 꽃들이 허공으로 나귀를 타고
꿈은 이렇게 서툴고
너의 머릿결과 호흡을 다 외우고 싶은데 우리
흑백이 되고 네가 없어지고 내가 저물고 꿈에
나는 마침표처럼 안녕을 말해야 하는데
지독하게 아름다운 그 꿈에.
98P, 여름 밤
- 이보다 안온한 밤이 없을 것입니다.
117P, 파도
누구 하나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대던 파도도
그리 꿈꾸던 뭍에 닿기도 전에
주저앉듯 하얗게 부서져버리는데
하물며 당신의 수심보다도 얕은 나는
얼마를 더 일렁인들
당신 하나 침식시킬 수 있겠습니까
129P, 여름 증후군
- 여름은 여러모로 당신과 닮았습니다
어느덧 도둑처럼 찾아든다든가
아니면 나를 덥게 만든다든가
139P, 흰 꽃이 향기가 짙다는 속설
- 나에게 다정한 악수였다가, 끊이지 않는 웃음이었다가
일기에 숨겨든 꿈인 당신에게
그 어떤 말보다도 소란하게 -
몹시-
144P, 안녕이라는 이름
나의 고요를 절개하고 때 아닌 비가 내렸다 비는 멎을 생각이 없었기에 당분간 젖은 성냥처럼 살기로 했다
점화되지 않는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수성 잉크로 적은 이름이었다
문득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곤 하는 이름 모를 전단지들이 떠올랐다
147P, 유실물
나는 늘 잘 잃어버리는 것들을 사랑하곤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되찾는 일은 없었다
163P, 진통의 이야기
끝도 없는 진통의 이야기
귀엣말로 죽음을 자꾸 세뇌시킨다
나는 병실에 마른 수건처럼 누워 뻣뻣하다
뜬 눈으로 긴 밤을 목주처럼 매만진다
나는 젖은 장작이라 삶의 불씨는 좀처럼 붙지 않고
-
핏줄을 건너 붉어진 날들
한 발 물러서면 잔돌 무너져 내리는 고통의 벼랑
끝이 나지 않는 진통의 이야기
170P, 장마
- 사랑은 이런 것이었고
- 이다지도 미련스럽고 지독했던 한철 장마였다
173P, 정류장
새벽을 찢는 버스 경적 소리에
- 두 손엔 오늘의 고통이 들려 있었고
177P, 장마전선
나는 문득 자살하고 싶어졌다
습기가 잡귀처럼 구천을 떠돈다
나는 마를 날이 없다
178P, 상사화 꽃말
너는 내 통증의 처음과 끝
너는 비극의 동의어이며
너와 나는 끝내 만날일 없는
여름과 겨울
내가 다 없어지면
그때 너는 예쁘게 피어.
183P, 불명열
- 사랑했음이 자명하다
- 정말이지 지독스러운 기후였다
193P, 환절기
네게는 찰나였을 뿐인데
나는 여생을 연신 콜록대며
너를 앓는 일이 잦았다
199P, 나에게 사랑은
나에게 사랑은 천년을 읊어도 다 읽지 못하는 것
너의 모든 좌절을 와락 끌어안고 투신해버리며
균열 사이로 줄눈이 되어 네 삶을 죄다 메우고
아프고 무너져 내리는 건 내가 다 하고 마는 것
네 울음을 한 점도 남김없이 등 뒤로 나직이 숨겨주는 것
수평선을 네게 내어주고도 그저 너만 떠오르길 바라고
세상의 모든 향기로운 고백의 주어를 너로 치환하는 것
너의 그늘을 죄다 훔쳐버리고 네게는 볕만 내어주는 것
개화하는 만물을 네게 모두 주고 나를 다 꺼뜨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너만 빛나기를 원하는 것
나에게 사랑은 지금껏 다 적지 못한 어여쁜 모든 것들을 네 손에 쥐여주는 것
202P, 엔딩은 있는가요
고통은 스스로가 죄인 줄도 모르고 덥석 찾아들어요 제 집드나들듯 삶을 들쥐 떼처럼 샅샅이 허물고는
이겨내려고 버둥거리는 나의 완전변태에 통증은 그치지 않는 비가 되고 날개는 젖으며 나는 또 불구의 삶이고.
- 체한 삶이 너무 얹혀서 하루가 자꾸 길어져요
223P, 마르지 않는 강(처음 접했던 서덕준 시인의 시)
처음 마주치는 순간
너는 큰 강이 되어 나에게 흐르고
나의 마음을 가로질렀다
하는 수 없지
차마 건널 수 없어 평생을 너의 강변에 걸터앉아
네가 마르기를 기다릴수밖에
225P, 사진 보관함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가슴 곳곳에 대못질을 했다
아빠는 내가 못을 박은 곳마다
나의 사진을 말없이 걸어놓곤 하셨다
226P, 귀 하나에 관하여
평생을 나는 귀 하나로 살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내 왼쪽으로만 여울졌고, 내게 값진 것들은 모두 왼쪽에 두었다.
그래서 내게 사랑은 늘 왼쪽에 있는 것들이었다.
- 엄마가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소리, 첫 사랑과 함께 들었던 노래 같은 것만 기억하면 좋을 텐데
귀가 하나뿐이라 언어로 입은 모든 음성의 찰과상까지도 내 왼쪽에 함께 묻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사랑과 고통이 내게는 동의어인지도 모른다.
- 다섯 차례의 수술을 겪으며 ・・・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어찌나 귓가에 철썩이던지, 마음이 침식으로 죄다 무너져 내렸다.
- 엄마는 나에게 원망을 세습해주었다며 늘 죄를 끌어안고 살아왔다.
- 평생을 나는 귀 하나로 살았다
나에게 사랑은 늘 왼쪽에 있는 것들이었는데
내 왼쪽엔 늘 엄마가 있었다.
232P, 무인도
- 빛으로 숨고 싶지만 내가 너무 짙어요
244P, 해빙
- 내가 짚는 곳마다 전부 무너지고 마는
246P, 장작
너는 몇 겹의 계절이고 나를 애태웠다.
너를 앓다 못해 바짝 말라서
성냥불만한 너의 눈짓 하나에도
나는 화형당했다.
262P, 창밖의 온온한 풍경을 기억하기 위하여
오전 6시 59분, 이제야 먹빛 밤하늘의 명도가 조용히 올라간다.
철로에 덜컹이는 모든 것들이 눈물겹다. 아침은 이렇게 분주하다.
오전 7시 8분, 어둠에서 빛이 드러나기까지는 마치 발화점에 도달하듯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들통난 아침은 불씨처럼 삽시간에 풍경을 채색하기 시작한다.
오전 7시 26분, 기차가 어둔 터널을 관통한다. 불현듯 귀가 먹먹해지기에 침을 삼켰다.
오전 8시 32분, 이름 모를 야생화가 창밖으로 지나간다. 그 꽃은 수많은 기차들과 몇 번의 이별을 했을까.
오전 8시 41분, 목적지에 곧 도착할 모양이다. 내릴 채비를 한다. 오늘은 채도가 낮은 하루를 보내도록 하자.
좋은 표현을 담은 구절들이 많아 아껴 읽었던 시집
이해하기 쉬워 깊은 생각을 도래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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