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지 않는 시, 구슬기 산문집
셀프 빨래방에 겨울 이불과 여름 시집을 들고 갔다. 무거운 이불이 돌아가는 동안 가벼운 시집을 펼쳤다.
그때 자동문이 열리고, 책의 쪽수보다 더 많은 주름을 얼굴에 머금은 할머니가 느릿느릿 들어오셨다.
누가 봐도 이곳이 처음인 듯한 걸음. 사람이라곤 손님이 나밖에 없고 키오스크 몇 대만이 요란하게 화상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여쭤봤다.
"제가 사용법 알려드릴까요?"
"아니 신기해서 그냥. 미안해."
오지 말아야 할 곳도 아니고 미안할 이유도 없지만, 젊은 사람들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노인들은 자주 미안해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나도 처음 여기 들어오니 뭐가 뭔지 몰랐다며 괜찮다고, 몇 번 오니까 겨우 익숙해졌다고 말씀드렸다.
그제야 할머니는 용서라도 받은 듯, 이것저것 여쭤보셨다.
여기서 옷을 빨면 되는 건지, 세제나 물을 더 넣지 않아도 알아서 씻기는 건지, 그럼 말리는 건 집에서 해야 하는 건지, 이 큰 통에서 빨래가 이렇게 마를 수 있는건지. 새로운 곳에 견학 온 어린이처럼 할머니는 궁금한 게 많았다. 하나씩 설명해드리는 것도 재밌고, 시간도 잘 가서 우리는 한 참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할머니는 한 번 더 용기를 내셨다.
"사실 내가 세탁기를 써봤어야 말이지."
21세기가 20년도 더 지난날, 세탁기를 한 번도 못 써봤다는 말은 오히려 공상과학 같았다.
전쟁 세대인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손빨래로 교육 받아 지금껏 손빨래로만 살아왔다고 했다.
너무 놀라는 것도, 너무 태연한 것도 실례일 것 같아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고
다만, 언젠가 주말에 빨래 가지고 오실 때 전화 주시면 같이 돌리자고 했다.
할머니가 떠나도 나는 시집을 다시 펼치지 않았다. 시보다 더 시 같은 말들이 귀 옆에서 어른거렸고,
문장 한 줄씩 곱씹다 보니 건조기마저 다 돌아간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 몇 날, 몇 주, 몇 달이 지나도록 할머니 전화는 오지 않았다.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는 오래도록 할머니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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