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건
시인의 말
어느 여름날, 나를 키우던 아픈 사람이
앞머리를 쓸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온 세상이 멸하고 다 무너져내려도
풀 한 포기 서 있으면 있는 거란다.
있는 거란다. 사랑과 마음과 진리의 열차가
변치 않고 그대로 있는 거란다.
발문 중
배가 부르면 시가 안 될까봐 하루에 한 끼 먹고 쓴다는 이야기의 장본인 고명재 시인.
세상을 돌보듯 말을 돌보는 당신의 다정함
이 시집은 선물 받은 시집이고, 현대시라는거 꽤나 어렵고 이해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안겨준 책이다
그때문에 선물 받은지 꽤 됐는데 이제서야 다 읽게 됐고, 한 번 읽을 때 2-3장씩만 읽을 수 밖에 없던..
고명재 시인의 인터뷰를 찾아보고 그제서야 조금씩 이해된 시들이 몇몇 있었고
결국엔 생각과 상상이라는거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거구나라는 일깨움을 준 시집
마지막 3부는 무슨 영문에서인지 하루만에 다 읽었다
그 날은 유독이 잘 읽혔고 그제서야 이 시집이 마음에 들었고
마음에 담아둔 구절이 많았던 3부의 시로 위로 받고 일깨움을 얻었다
⎡그이는 언제나 좋아하는 것에 곱하기 열, 스물을 하는 사람이니까요.
진짜를 알아보는 정확한 눈을 가진 사람이지만, 사랑이 씌면 열과 불에 휩싸인 듯 애정이 지나친 양반이라⎦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건. 고명재 시집중
32P, 페이스트리
매일 사랑하는 사람의 유골을 반죽에 섞고
언덕이 부풀 때까지 기다렸어요
물려받은 빵집이거든요
무르고 싶은 일들이 많아서
사람이 강물이죠 눈빛이 일렁이죠
사랑은 사람 속에서 흐르고 굴러야 사랑인 거죠
인연은 크루아상처럼 둥글게
- 저마다의 별무리 저마다의 회오리
저물녘이면 소용돌이치는 무궁화 속에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거예요
가장 아름답게 무너질 벽을 상상하는 것
페이스트리란
구멍의 맛을 가늠하는 것
우리는 겹겹의 공실에 개들을 둔 채
바스러지는 낙엽의 소리를 엿듣고
뭉개지는 버터의 몸집 위에서
우리 여름날의 눈부신 햇빛을 봐요
나는 안쪽에서 부푸는 사랑만 봐요
불쑥 떠오르는 얼굴에 전부를 걸어요
오븐을 열면 누렁개가 튀어나오고
빵은 언제나 틀 밖으로 넘치는 거니까
빵집 문을 활짝 열고 강가로 가요
당신의 개가 기쁨으로 앞서 달릴 때
해질녘은 허기조차 아름다워서
우리는 금빛으로 물든 눈에 손을 씻다가
흐르는 강물에서 기다란 바게트를 꺼내요
38P, 어제도 쌀떡이 걸려 있었다
-
어둠은 어두운 마음을 알아서 어둠 속 어둑한 심장을 거두고
어둠은 어두운 시간을 날아서 절룩이는 다리로 흰 떡을 삼키네
한 학자는 나방을 침묵의 귀족, 밤의 방패, 어둠의 담요라고 명명하는데
그는 평생 나방을 관찰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통 나방이 빛을 좋아해서 광원에 매달린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나방은 빛을 혐오합니다 그들은 우아하고 진중할 뿐이죠
어둠의 입장에서는 빛이 밤의 구멍이고 그 요란한 빛의 구덩이를 메우기 위해
그들은 온몸을 던집니다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위해 존재의 품위와 부드러운 꿈결을 위해
침묵을 위해 다친 마음과 벌어진 입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저 먼 시간을 날아가
밤의 상처에 날개를 덮는 거지요
46P, 소보로
- 그때 나는 빵을 물면 밀밭을 보았고
그때 나는 소금을 핥고 동해로 퍼졌고
그때 나는 시를 읽고 미간이 뚫렸다
그때부터 존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그때의 네가 창을 흔든다
그때 살던 사람은 이제 흉부에 살고
그래서 가끔 양치를 하다 가슴을 쥔다
그럴 때 나는 사람을 넘어 존재가 된다
54P, 엄마가 잘 때 할머니가 비쳐서 좋다
-
베란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둔 금귤을 보는게 좋다
귤 말고 금귤의 덩치가 좋다
금관악기에 매달리는 빛의 손자국이 좋다
약조보다는 약속을
가장 여린 손가락을
서로가 서로에게 거는게 좋다
복숭아와 복숭아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막을 수 없는 친근감도 숨막히게 좋다
엄마가 잘 때 할머니가 비쳐서 좋다 떠난 사람이 캄캄하게 보고싶어서
가슴속의 복숭아를 반으로 가르는
과육의 슬픔도 과도도 향기도 모두가 좋다
유품을 만지는 걸 멈출 수 없다
이렇게 비가 오고 전화기가 잠잠해질 때
사랑이 으깨져 사랑의 맨살이 짓물러갈 때
내 속에는 사랑의 장대비가 맨살에 때리고 여름을 흔들고
저 높은 나무의 푸름을 두드려
거리에 천막에 장화에 새싹에 청개구리에
아무렇게나 금귤처럼 반짝이면서
함부로 칠해둔 당신의 낯빛이 좋았다
물러서는 사람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폐가 터지도록 달려서 봤던 마지막 얼굴이
내 남은 여름을 후회로부터 지켜주었다
56P,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
62P, 몸무게
어떤 선로에 서든 올 것 같았다
오른쪽 왼쪽을 안 본 적 없다
발에 진동을 느낀적도 있다
더는 쓰지 않는 철로였는데
침묵이 빛나고 발가락이 간지러웠다
오는거 아닌가, 꼭 보게 만드는
그렇게 늘 오는 것이고 싶었다
- 그게 불안일지라도 비참해져도
이탈을 모른 채
너에게 정직한 땀을 뻘뻘 흘리며
네 턱에 닿는 눈빛만으로 여름이 열리고 있었다
63P, 바이킹
-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버리고
네가 다가올 땐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 그 순간 알았다 더는 바다가 두렵지 않다고
이 배는 오래됐고 안이 다 삭아버려서 더 타다가는 우리 정말 하늘로 간다고
64P, 그런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잘 익을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남의 말을 시라고 한다 누가 혼잣말로 추워,라고 말해도
온갖 비평가들이 담요를 들고 곁으로 다가와 모닥불을 피우고 귀를 기울여준다고
그런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잘 익을 것이다 해질녘은 이민자들로 넘쳐날 테고
온갖 종류의 빵냄새와 인사말이 섞이는 그런 아름답고 시끌벅적한 강변을 생각해
어느 나라에서는 외국어를 시라고 믿는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외국인으로 간주한다
- 가끔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이들은 외국어를 넘어 새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
어떤 이들은 그 풍경을 소중히 여겨서 강가의 조약돌이며
반짝임까지도 모두 모아서 도서관으로 보낸다
70P, 등
- 너는 뒤에 앉은 얼굴은 보지 못한 채
숨을 색색거리며 은빛 페달을 밟고
나는 너의 따스한 배에 손을 얹고서
왼편의 풍경 속으로 나아간 것인데
- 나는 너의 등에 귀를 대고서
일본식 소책자라도 읽는 것처럼
왼편의 풍경이 오른쪽 어깨로 넘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보는 것인데
- 마른 팔을 붙잡고 땅을 헤엄치리라
- 나는 너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사랑한다 말하고 너는 메말라가고
그래도 괜찮다 지금은 페달을 밟으며
나아가는 느낌 속에 우리가 있기에
발끝을 툭툭 스치는 유채꽃 머리
미지는 그렇게 조용히 몸을 두드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눈앞이 선한 등으로 가득했다
72P, 초록
- 비가 올 땐 이렇게 나란히 선 채로
어깨가 젖는 줄도 모르고 걸었지
영화를 볼 때도 서로의 윤곽을 쓸어 담느라
같은 영화를 수십 번 봤지 빛만 닿았지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것 같았지
- 묵직한 열차가 심장 쪽으로 들이닥칠 때
얼굴을 멈추는 방법을 아냐고 물었다
나는 얽힌 노선을 풀면서 모른 척했다
74P, 사이 새
- 펄펄 끓는 주전자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과도를 든 손목에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레몬을 갈라 흠집 속의 세계를 엿보며
너와 함께 눈부신 음을 핥고 싶었다
76P, 보라
- 보라는 차가운 빨강이다
- 사랑도 미래도 독재도 속옷도 투명해질 때
얼음이 언다 다리를 절며 슈퍼로 간다
평화로운 햇살이 뒷목에 내린다
- 젊은 연인이 손을 잡고 슈퍼를 지난다
고양이가 무당개구리를 삼키고 토한다
보랏빛 사체가 바닥에 뭉개져 있다
계속했다면 내장이 눈처럼 녹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샅이 솥처럼 끓어버렸고
계속했다 시리고 빛이 보고 싶었고
계속했다면 내일이 완전히 파괴됐을 것
78P, 우리는 기온이 낮을수록 용감해진다
- 스웨터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깍지를 끼는 과정도 섬세하다
1. 나란히 걷는다 웃음을 누른다
2. 주머니 속의 순록을 살살 흔든다
3. 허벅지와 순면 사이의 보풀을 느낀다
4. 손톱 밑이 가렵도록 손을 데운 뒤
5. 눈 녹는 것처럼
∞. 손가락에 손가락을 섞는다
80P, 얼얼
- 간혹 열이 내리는 여름의 기적이 있기도 했다고
82P, 자유형
- 수영을 시작한 건 귀하게 숨을 쉬고 싶어서
죽을 것처럼 보고플 때 빠지지 않고
숨을 색색 쉬며 용감하게 나아가려고
그러니 우선 자유부터 익혀야 해요
몸에 힘을 빼고
수박에 줄을 긋듯이
물속에선 마음껏 일그러져도 괜찮아
- 어때요 기분 좋은 저항이 느껴지나요
물레 감듯 모든 걸 안고 나아가세요
강사님은 아름다운 말만 툭툭 내뱉고
나는 그게 수박씨처럼 귀하고 예뻐서
눈귀코를 번쩍 뜬 채 팔을 뻗쳐요
그렇게 품을 알 때까지 수영은 계속되어요
내가 품은 구절들
귀하게 숨 쉬는 법을 찾는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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