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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지 않는 시

다시 오지 않는 시, 구슬기 산문집 셀프 빨래방에 겨울 이불과 여름 시집을 들고 갔다. 무거운 이불이 돌아가는 동안 가벼운 시집을 펼쳤다.그때 자동문이 열리고, 책의 쪽수보다 더 많은 주름을 얼굴에 머금은 할머니가 느릿느릿 들어오셨다.누가 봐도 이곳이 처음인 듯한 걸음. 사람이라곤 손님이 나밖에 없고 키오스크 몇 대만이 요란하게 화상으로 맞이하고 있었다.조심스럽게 일어나 여쭤봤다. "제가 사용법 알려드릴까요?""아니 신기해서 그냥. 미안해." 오지 말아야 할 곳도 아니고 미안할 이유도 없지만, 젊은 사람들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노인들은 자주 미안해한다는 걸 알고 있다.나도 처음 여기 들어오니 뭐가 뭔지 몰랐다며 괜찮다고, 몇 번 오니까 겨우 익숙해졌다고 말씀드렸다.그제야 할머니는 용서라도 받은 듯, ..

2024.10.14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 Mazeppa, 김안 시집 망각이 용서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 용서가 영혼을 병들게 만든다고 했던가.딸아이와 함께 나온 초저녁 산책 길에 본, 죽은 나무 그늘 아래 죽은 잿빛 비둘기와, 죽은 새끼 고양이와, 이미 죽어있던 것들, 갓 죽은 것들. 울던 딸아이를 달래 그네에 태우고 힘껏 밀다 보면 집집마다 뿌옇게 등 켜지고, 딸 아이는 죽은 풍경을 잊고,그네를 타며 작고 둥근 머리를 치켜들고 제 집이 몇 층인지를 헤아리고, 그렇게 높고 가파르게 적재된 가정들 틈에서 나는 선한 의지와 땅과 몸, 얕고 서글픈 역사, 눈 밖에 있는 자들 등만을 딴에 멋지게만 기억하려 하겠지. 어쩔 수 없는 걸까. 과연 그럴까 그럴 수밖에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이렇게 함께 너..

2024.10.11

평온 평안 편안 안온 중 평안

헤르만헤세, 밤의 사색중 행복을 찾아 헤매는 한 그대는 행복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그대가 가진 가슴 소중한 모든 것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을이미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는 한 그대는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리기만 한다그대, 평온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가모든 소망을 접을 때 목표도 열망도 모를때, 행복의 이름을 더는 부르지 않을때 비로소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이 그대의 마음을 더는 괴롭히지 않고, 그대의 영혼은 평온해지리라.

2024.09.26

순애

아타카마 바다와 등을 맞대고 늘 젖은 척추를 굽어 늘 메마른 마음으로 아타카마 사막은 그곳에 있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마음 그 가뭄 진 마음 사이마다 입병처럼 소금 자국이 열거된 아타카마에 사상 유례없는 폭우가 예보되었다. 황무한 마음에 첫 세례처럼 몇 날 며칠, 쏟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찌할 수 없는 그 통제 불능을 내리 맞았다. 쏟아지는 것은 왜 자꾸 마음을 젖게 하는지, 욱신거리는 마음을, 일렁이는 마음을 도무지 참다못해 아타카마 사막의 씨앗들은 모두 스스로를 와락 피웠다.  사막이 처음으로 잔뜩 꽃밭이었던 날이 있었다. 하루만이라도 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던 사막의 서툰 욕심, 미처 다 식지 못한 마음, 멀미 같았던 개화.이제 아타카마는 다시 사막으로 회귀한다. 다시 메마른 ..

2024.08.29

충실한 현재

끝이 있기에 더 소중한, 덧없는 인생에 대한 찬사일 뿐.물리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간의 차이는 필멸자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오히려 더욱 영원을 갈망하게 만든다. 그저 추억과 염원을 품고 지금에 충실할 수 밖에.과거도 미래도 손에 쥘 수 없는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오로지 지금뿐이니까. - 서로다른 타임라인  나는 가슴속에서 작은 열정 하나가 반격에 나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 과거도 미래도 퇴색하고, 현재만이 빛을 발한다. 시원스러운 바람이 광장을 불어가고, 나는 바람의 흐름에 눈길을 고정시킨다. 사방팔방에서 두오모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긴 그림자가 돌길 위에서 흔들리고 있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를 이길 수 없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일순간이며, 그것은 열정이 부딪쳐 일으키..

2024.08.16

주워담은 글

치토세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무던히도 편지를 썼다날씨가 춥다는 말과 내 마음이 춥다는 말둘 중 무얼 적어야 할지 몰라서 창밖을 내다 보았다구름뿐이었다나도 저렇게 하늘을 유영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착륙할테니 창문 커버를 올려주세요 안내 방송이 나왔다사람들이 일제히 창문을 열자 수많은 빛들이 마음을 탐하고 들어왔다내가 너의 첫사랑이길 바란 적은 없지만마지막 사랑은 더더욱 아니어도 좋지만,적어도 사랑이면 좋겠다고    - 돌아다니는 어느한 글중       -

2024.06.04